30년. 한 인간이 태어나 성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다. 1996년 제1회를 시작으로 2025년 30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이제 단순한 영화제를 넘어 아시아 영화산업의 나침반이자, 세계 영화계의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올해 영화제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30주년이라는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2025년부터 도입되는 경쟁 부문으로 인해 BIFF는 비경쟁 영화제에서 경쟁 영화제로 전환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고 있다. 이는 마치 갤러리에서 콘서트홀로 변모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성격 변화를 의미한다.
거장들의 부산 집결, 그 의미를 읽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이 최초로 내한한다는 소식은 단순한 화제성을 넘어선다. 델 토로는 판타지와 호러 장르에서 독보적인 미학을 구축한 작가이며, 87세의 벨로키오는 이탈리아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들의 부산 방문은 BIFF가 이제 유럽 거장들도 주목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의 참석 또한 상징적이다. 비노쉬는 단순한 배우가 아닌, 유럽 아르하우스 영화의 뮤즈이자 영화 예술성의 척도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의 부산 방문은 BIFF가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성숙한 영화제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노라>로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을 거머쥔 션 베이커 감독의 참석은 또 다른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베이커는 독립영화 출신으로 주류 영화계에 돌풍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의 존재는 BIFF가 여전히 새로운 목소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쟁 부문 신설, 패러다임의 변화
당해 아시아 영화들이 초청 대상이며, 5개 부문(대상·감독상·심사위원특별상·배우상·예술공헌상)에 부산 어워드를 시상하는 새로운 경쟁 부문의 도입은 BIFF 역사상 가장 큰 변화다. 이는 단순한 프로그래밍의 변화가 아니라 영화제의 철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29년간 비경쟁 영화제로 운영되며 '발견과 소개'에 집중했던 BIFF가 이제 '평가와 시상'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시아 영화의 질적 성장과 BIFF의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더 이상 서구 영화제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영화의 기준을 제시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숫자로 보는 영화제의 성장
올해 공식 초청작은 지난해보다 17편 늘어난 241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선택의 엄격함에 있다.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241편을 선별한다는 것은 큐레이션의 전문성과 안목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연계 프로그램인 커뮤니티비프 상영작 등을 더하면, 전체 상영작은 총 324편이라는 규모는 이제 BIFF가 단순한 영화제가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임을 보여준다. 상업영화에서 실험영화까지, 장편에서 단편까지,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까지 아우르는 이 생태계는 영화라는 매체의 다양성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개폐막식의 새로운 실험
개막식 사회는 배우 이병헌, 폐막식 사회는 배우 수현이 맡아 진행한다는 소식도 주목할 만하다. 이병헌과 수현은 각각 한국 영화계의 다른 세대와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병헌은 국제적 인지도와 연기력을 겸비한 중견 배우이며, 수현은 젊은 세대의 감성과 글로벌 어필을 동시에 지닌 배우다.
영화감독 민규동 감독에게 부탁해서 개폐막식 전체 연출을 맡게 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민규동 감독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넘나드는 연출력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의 연출 하에 진행될 개폐막식은 기존의 정형화된 행사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9월 개막의 전략적 의미
부산국제영화제가 평년과 다르게 9월에 개막한다는 점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기존의 10월 개최에서 9월로 앞당겨진 것은 단순한 스케줄 조정이 아니라, 국제 영화제 캘린더에서의 포지셔닝을 재고한 결과다.
9월은 베니스 영화제 직후, 토론토 국제영화제와 거의 동시기에 해당한다. 이는 BIFF가 더 이상 아시아 지역의 영화제가 아니라 글로벌 영화제 서킷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토론토 영화제가 오스카 전초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BIFF는 아시아 영화의 세계 진출 관문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위기의 한국영화, BIFF의 역할
30주년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위기 속 한국영화를 극복하는 구원투수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영화는 팬데믹 이후 관객 감소, 제작비 상승, 플랫폼 환경 변화 등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BIFF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넘어, 한국영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국제적 네트워킹을 통해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특히 새로 도입된 경쟁 부문은 아시아 영화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결론: 새로운 30년을 향한 출발
30주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BIFF는 지난 30년간 아시아 영화의 발견과 소개에 집중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아시아 영화의 평가와 확산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 부문의 도입, 개최 시기의 조정, 국제적 거장들의 대거 참여는 모두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다.
이번 영화제를 두고 영화인들은 기념비적, 역대급이란 단어를 말하고 있다는 평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는 BIFF가 아시아 영화계에서 갖는 위상과 영향력,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인정이다.
9월 17일, 영화의전당에서 시작될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닌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30년의 축적된 경험과 새로운 도전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라는 예술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